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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Korean, and live in Japan
가나자와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한일부부
2020. 1. 19.
가나자와 거주, 쥬얼리 제작자. 유튜브 채널에서는 일본 도시락 만들기및 가나자와 풍경 기록중입니다. 🍱
가나자와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한일부부
본 게시글의 최초 게시일은 2019. 7. 22. 17:50 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100주년의 2019년.
가나자와에서의 의미있는 한 걸음.
안녕하세요 :) 가나자와 생활중인 한국인 아내 마루짱입니다.
이 글은 8월15일에 완성하여 광복절에 올리기위해 조금씩 작성해둔 글입니다만,
좀더 빠른 시일안에 올리게되었습니다.
글이 길어지니 모니터 화면에서의 읽기도 추천드립니다.
7월 21일.
4개월만에 찾은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에는 무성한 나뭇잎들과 풀들이 자란, 숲에 둘러쌓인 계절의 풍경으로 변한 후였습니다.
일본에서는 국회의원선거가 있었던 7월 21일, 일본의 #수출규제보복 문제로 이해 한국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일본여행취소 #일본제품불매운동 등이 연일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에, 한주동안 꽤 이 문제로인해서 마음이 시끄러웠던 저는 정말이지 갑자기 오전부터 이유없이 산에 가고 싶어졌어요.
금요일 저녁이나 주말 아침만 되면 여러가지 잡지를 찾아보며 "마루짱 이번 주말에는 어디에 가보고싶어?" 라고 묻는 그이 덕에 생전 처음 가본적도 없는 곳들, 새로 경험하는 데일리가 많았던것은 정말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지만, 이번주 나의 대답은.
"오랜만에 노다마치에 다녀올까?"
아침일찍 남편과 저는 마트에 가서 묘지에 꽃아둘 꽃을 사고 , 필요한 재료들을 구매하고서 차를타고, 가나자와역 근처에서 30분정도면 다다를 수 있는 노다마치의 윤봉길 선생님 암장지 에 다녀왔습니다. 지금이 여름이라는 시기를 새까맣게 망각한채, 남편은 반바지 반팔, 저역시 반팔 차림이었던것이 TV에서만 보고 라디오에서만 듣던 , 수십마리의 모기떼 에게 공격을 당할것이라는것을, 그들에게 오랜만의 포식과 같은 뷔페를 제공하게될것이라는것을 예상도 하지 못한채로 말이죠.ㅠㅠ (방문하시는 분들 여름에는 꼭 약 챙겨가시거나 모기약 무장 하고 가시기를 바라요.)
당일은 일본의 국회의원 선거날이었어요. 남편은 여러가지 이유로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니 독재국가의 일본이 아니라면 뭐라 압력 넣을 이유가 없겠지요 (민주주의 국가라면서요)
21일의 썰을 잠시 풀자면... 이시카와현에서는 두명의 후보가 나왔는데, 한 후보는 정말 신인후보. 또 한 후보는 개인적으로는 언급하고싶지도않은 X민당 후보였습니다. 결국 X민당후보와 신인이었던 후보가 모두 좋은 결과를 얻어냈지만 여러가지 흐름을 미루어봤을때 남편은 X민당에 표를 주기 싫은 모양이었어요. 일본에서도 택시를 타거나 노년층과 대화를 나누면, 아X가 참 잘하고있어 등등의 이야기들을 듣게되어 답도없지만, 그런사람들이 많이 노출되느라, 정작 중년층과 젊은 층의 입장들은 묵살되는 경우가 많아요.
참고로 남편과 저는 옳고 그름 앞에서 조차 "중립을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맞고 틀림이 확연히 드러나는 상황속에서도 중립을 지킨다 라는것은 일상생활에서의 일들중 참 모순적인 불쾌함을 가져다줄때가 있었어요. 예를들어, 학교에서 누군가가 심한 따돌림을 당하는것을, 저는 적어도 중립을 지킨답시며 얌전히 이성적인 태도를 취한다기보다는 함께 따돌림을 당하더라도, 그 아이의 곁에 늘 있어주는 인간인게 맞다는 제 소신을 가지고 있어요.
소신이요.
엉뚱한것에 소신을 지키는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계산했을때조차 "이건 진짜 아니지" 싶은것들앞에서 지켜내는, 주위의 분위기에 귀팔랑, 이리 저리 흩날리는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아닌 굳건한 신념. 생활력이 꽤 강한 저는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고 소신을 갖게되는 생활환경에서
어쩌면 자라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인생선배들에게 좋은 가르침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이예요.
어느 정당의 유세현장에서, 반대의 인터뷰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신고를 당하고 폭력을 당하고.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보며 느낀것이지만은 적어도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의 시민들이 시민의식이 깨어있고 민도가 높으며 더이상 억지스러운 거짓놀음에 속아나는 일은 예전보다는 어려워졌다는 것 정도는 제가 알아요. 일본의 저런 상황들이 우리나라에서도 불과 몇년전까지 이어졌다라는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대한민국을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시기이기때문에
저는 참 행복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에 중국 상하이 에서 조직,선포된 우리나라의 임시정부를 말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삼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제 정부였고,
독립운동을 총지휘하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임시정부는 수립 이후 끝없는 갈등과 내분으로 수차례 해체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27년간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핵심체로 큰 역할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뭐든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감정적인 인간이라는 동물로써, 굳이 이야기를 새겨 내려가보자하면, 우연인지 필연인지, 딱 대한민국 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의 해인 2019년 3월 1일인 3*1절날, 일본인 남편과 함께 30수년간 내 몸뚱이의 모든 생활이었던 대한민국을 떠나 남편의 고국인 일본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남편은 한국의 회사에서 4년반 남칫한 회사 생활을 해오다가, 저와의 결혼후 일본으로 전직을 한 케이스로, 한국인 아내였던 저는 미리 예정이나 해둔듯이 일본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절차를 밟게되었지요. 마치, 일본인 남편과 결혼을하면 언젠가는 일본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현실속에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들 처럼요.
그래도 남편은 여전히 한국을 그리워하고있고, 한국의 회사에서도 감사패까지 받을 정도로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회사생활에 임했으며,
한국동료들및 친구들도 두루두루 사귀고, 또 자연스럽게 한국 역사에도 무지했던 지식을 채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죠. 저희 남편은 이런 한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한국을 좋아하고, 서울보다는 동탄을 좋아하고😓 , 한국의 4계절의 공기를 사랑하는 마음 뜨거운 일본 남자입니다.
자랑이냐구요?네, 어떤부분으로는 자랑이 될까요?
이주 준비를 하던 당시때부터 하루하루 블로그에 기록을 옮겨두었었던것으로도 알수있었지만, 예정되었던 다음 회사의 스케쥴, 집을 구하는 문제와 더불어 여러가지 업무를 봐야했던 여러가지 일본생활 준비를 통털어 정해졌던 이사 준비였기애. 감정을 추스린다, 추억 정리한다 뭐다할 시간도없이 남들보다 좀더 빠른 시일안에 후다닥 정리해서 이주하느라, 진짜 너무나 정신없이 전개되어 혼란스럽기까지 했어요.
정신 차려보니 7월입니다.
올해 초부터 남편이 한국에서 늦게나마 접했었던 한국의 마음아픈 역사속의 이야기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박물관을 통해 체험하며 , 일본 자국의 선조들이 다른 한 나라를 점령하려했던 일제 강점기 때의 한국에서 무슨일들이 있었는지, 한국 선조분들에게 어떠한 만행을 행했는지, 일본에서의 폐쇄적인 역사 교육으로는 절대 배울수 없었던 역사들을 고스란히 접하게 된것이죠.
이부분은 일본 친구인 사야카짱이 했던 발언과 일치합니다.
블로그에 포스팅했었던 일본인 남편과 , 오래된 친구 사야카짱의 용산구 식민지 박물관과 서대문구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방문기(영화말모이까지), 의 글들을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시고, 마음에 와닿는 코멘트를 적잖게 남겨주셔서 저에게도 큰 뿌듯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도 봐주시고 공감해주고 계신 분들이 계셔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차가움이 가시지 않았던 지난 3월
그리고
가나자와 성 공동화장실.
남편과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로 이사를 오게된것은 무척 우연이기도, 필연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한국의 국내의 역사기록 지역은 직접 찾아가기 쉽지만, 비행기나 배를 타고 나가야하는 해외의 지역은 쉽사리 방문하기 어렵기때문인데,
이주를 하게된 가나자와라는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바로 윤봉길 의사의 순국지가 있다라는것은 정말 방문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였기때문이었어요.
과거 블로그 이웃분으로부터도 추천을 받았지만, 이미 이시카와현에 윤봉길의사의 순국지가 있다. 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기때문이예요.
제가 윤봉길 선생님의 역사공부를 하는데에, 현장까지 잘 갈 수 있도록 안내를 해주셨던 감사한 분이 계신데요, 바로 임정로드 4,000km 저자이시기도한 오마이뉴스 의 김기자님이세요. (김종훈기자님)
아직 이시카와현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판가름이 안서던 때, 한국인들에게 이시카와현의 인기관광지인 "가나자와성"은 가나자와 입문 새내기로써 한두번정도 다녀온 상태였지요. 남편은 새로운 회사에 출근하기 전에 몇주동안 공시간이 있어 , 새로운 회사에 첫 출근하기전에 마지막 휴가라고 생각하고 어디든 다녀오자고 한 상태였고,
비가 부슬부슬 아침부터 떨어지는날, 일본인 남편이 먼저 꺼낸 한마디. "지난번 이야기했던 한국 독립운동가의 묘지에 다녀올까?"
(사실 이때까지만해도 윤봉길 선생님의 이름 석자는 잘 몰랐던 남편)
일단 날씨가 좋진 않았지만, 묘지만으로는 성이차지 않았고, 기왕 나가는거 다녀올 수 있는 곳이라면 모두 다 다녀오는것이 좋겠다. 싶었습니다. 어디를 가면 좋을까요. 좀더 많은 곳이 있진 않을런지요.
외출을 준비하면서 네이버 블로그 검색을 통해 한 기사를 보게되었고, 우연히 오마이뉴스의 김종훈 기자님의 기사 링크를통해 기자님의 블로그를 안에서 정보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무심코 적은 코멘트에, 김종훈 기자님께서는 실시간 답변으로 블로그에 코멘트를 달아주시면서 채팅아닌 채팅같은 정보를 전달해주시어 저희 부부가
가나자와성 안에 있는 윤봉길 선생님께서 순국하시기 전 하루를 머무신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찾는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김종훈 기자님 감사드립니다.
가나자와성에 대한 관광모드의 자세한 설명은 이번 포스팅에서는 배제하겠습니다.
역사 되짚어보기도 되짚어보기이지만, 한편으로는 이곳은 남편의 나라이기도 하지 않는가요. 내나라 역사 공부를 하려고 남편도 처음 겪는 이시카와현까지 이주를 한것이 아니니. 내 목표만을 달성하고 돌아갈것이 아니라, 남편이 하고 싶은것또한 함께 진행하는것이 도리이죠.
저는 꽤 보는둥 마는둥 이었습니다만은.
처음 왔을때에는 눈도장만 찍어두고 돌아갔지만, 이번에는 이곳까지 시간내서 함께 와준 남편은 가나자와 성 안을 골고루 보고 싶은 모양이라, 저도 겸사겸사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검사도 하지 않는 티켓을 각각 310엔을 주고 구매하였습니다.
티켓을 두장 끊기전, 가나자와성 매표소 바로 오른쪽에 보이는 큼지막한 공동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헌데, 이 공동 화장실에는 정말 충격적인 과거가 있다라는것을 나중에 알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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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희 나라에도 다양한 역사가 존재하겠지.
과거 우리나라를 침략했을때의 끔찍한 악몽과도같았던 수십년의 불행의 과거 이외에
전혀 관계없는 너희 나라만의 고유의 역사가 , 여기저기 살아숨쉬고 있겠지.
우리가 우리 역사를 소중히하듯, 너희역시 너희역사가 대단하고 고귀하겠지."
날씨가 날씨였던것 만큼, 계절이 계절이었던 것 만큼 3월 22일의 하루는 왠종일 회색빛 세상이었습니다. 언제그랬냐는듯 세상의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가고, 모든것은 바뀌고 움직일 수 밖에없습니다. 그나라의 국민이 그나라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따라 그나라의 국격의 차이는
절대적으로 비례한다. 라고 생각하게된것이 2019년의 제 자신입니다.
어찌저찌 일본인 남편과 결혼을 했고, 도쿄로 갈수도, 요코하마로도 갈수도 있었던 나의 미래가, 이곳 일본 이시카와현으로 오게된것은 우연이든 필연인지, 그렇게 결정된 것이었어요. 한국내에서는 역사 기록을 확인하기 쉽지만, 외국에 있는 장소는 한국인들이 쉽게 방문하기는 정말 마음 단디 먹지 않으면 어려운 문제이니까요.
남편과도 저역시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소통과 공감이 필요했고, 저역시 남편을 이해하려 노력, 남편 역시 제 마음을 이해해주려 노력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불편한 이야기 꺼내기 싫어하는것" 에대항 성향, 둥글게 살아가기 위해 본인의 신념은 사회에서 묵살해야하는 문화, 공기의 흐름을 읽고 공기의 분위기를 따른다 라는 그런 지긋지긋한 것들이 지금의 자국의 "역사" 문제를 다루고 대하고 생각하고 표현하는것을 점점 조여와 최악의 사태까지 이른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서로의 나라의 성향과 문화가 조금씩은 장점이 될지 모르나 그문화가 맞다. 그렇게 하는게 옳다라고 하시는분들은
그냥 국적을 바꾸세요.
가나자와성 매표소 오른쪽으로 가장 처음 보이는 공동화장실
"윤봉길 선생이 순국 하시기 전날
하룻동안 묵으셨던 위수감옥으로 예측되는 공간입니다"
가나자와성에 들어가시게된다면 꼭 한번 더 생각해주세요.
1932년 12월 18일, 윤봉길 의사는 오사카에서 사형 집행을 위해 비밀리에 가나자와로 압송된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훙커우공원의거(도시락 폭탄 사건)로 상해파견군 제9사단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상해에서의 공개 처형도 언급되었지만, 김구 선생의 체포를 위해 윤봉길 의사의 사형 집행은 계속해서 연기되었다. 그러던 도중 국제여론은 악화되었고, 이를 의식한 일제는 윤봉길 의사를 오사카성 안에 있는 제4사단 육군위수형무소에 이감시키기로 결정한다.
윤봉길 의사는 11월 18일 상해에서 호송되어, 11월 20일 오사카성 육군위수형무소로 이감된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사형이 집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가 오사카로 이감되자, 오사카 반제국주의 동맹에서 윤봉길 의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전단지를 발행하기 시작한다. 오사카 반제국주의동맹은 재일 조선인들이 많았으며,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일제를 향한 재일 조선인들의 민심은 날카로워져만 갔다. 불안함을 느낀 일제는 오사카에서의 사형 집행을 철회하고 삼엄한 경비 속에 윤봉길 의사를 가나자와로 압송시킨다. 가나자와시에 있는 모리모토역에 하차한 윤봉길 의사는 가나자와성 안에 있는 위수구금소로 보내진다. 윤봉길 의사는 위수구금소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19일) 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윤봉길 의사가 뜬 눈으로 지새운 위수구금소 건물은 현재 철거된 상태이며, 그 자리에 공중화장실이 들어섰다. 가나자와성 하시즈메문의 입장표 발권소 건너편에 있는 공중화장실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오마이뉴스 기사 인용 :http://omn.kr/1iukw]
역사 학계에서는 아직도 가나자와성 안에있는 현재 공용 화장실중 하나가, 윤봉길의사가 순국하기 전날,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구금소 였을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임정로드4,000km 저자 이시기도 하신 김종훈 기자님께서는 가나자와시 데이터베이스에서 발견한 정보들을 필두로, 바로 이 공용 화장실이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구금소였다는 것을 확신하신 듯합니다.
가나자와성 정문에서 너무 가까이 있던 , 접근하기가 너무 쉬웠던 점으로 "설마설마, 여긴 아니겠지" 라며 지나쳤던 생각은 마음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 너무나 사람들에게 현재로써는 "공용화장실" 이라는 건물의 개방된 곳이라는 아이러니함과 참담함. 참으로 치욕스러운 마음에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에서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과 함께 가나자와성 내부를 둘러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지나가는 한국 남성 여행객도 지나치고, 많지는 않지만 종종 만날 수 있는 가나자와에서의 한국 관광객들을 보면 내심 마음 한구석에 안심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분들은 알고 오신것일까요, 혹, 조금이라도 인식은 하고 계신걸까요.
혹은. 여행으로만 오셨다가 굳이 비행기타고 방문해야만 힘겹게 다다를 수 있는 이 역사적인 공간을, 여행과 함께 겸사겸사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라는것도 모른채, 개인 여행만 즐기시던 분들이실까요. 물론 알던 모르던 그들의 자유이기애 저로써는 감나와라 배나와라 , 감히 판단하거나 신경쓸 문제는 아닐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남편과 가나자와성 매표소에서 티켓을 구매하기전에 다녀왔었던 공동 화장실의 건물이 들어서기전 윤봉길 선생님이 하룻동안 묵으셨던 위수감옥터 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된후 온몸에 소름이 돋아 견디기가 힘들더군요.
앞서 이야기한바가 있는 오마이뉴스의 기자님이시자, 임정로드4,000km의 저자이시기도하신 김기자님께서는 실시간 블로그 답변 리플들로, 저희 부부가 조금이라도 더 역사적인 공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기자님 블로그에 있던 단 한장의 사진만을 가지고, 여기저기 살펴보며 고민하던 일본인 남편.
"마루짱, 아무리봐도 그 화장실은 저기가 맞는것 같아.
우리가 지나간 화장실."
정말 아니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남편과 함께 블로그의 사진을 저장해두고 보고 또보고 길을 따라가 다다른 곳에서 펼쳐진 눈앞의 모습에.
갑자기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저여자 뭐하는거야?"
지나가던 젊은 일본사람들이 다 들리게 중얼대며 내 뒤를 지나갈때까지도, 저는 과거 윤봉길 선생님이 구금되셨던 구금소로 추정되는 매표소 오른쪽 공동 화장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잠시 두눈을감고, 두손을 모아 여러가지 마음의 기도를 했습니다. 아무렴 어때, 누가 보면 어때, 이런 내모습보고 저렇게 떠들면 어때.
아까까지 내 뒤에 따라오고있던 남편은 어디에있는지 신경쓰지않은채로 오로지 성큼성큼 걸어나와 이렇게 기도해봅니다. 1분 남칫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을지. 천천히 눈을뜬 저는 저의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짐을 알고 고개를 돌려보았고, 나와같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뒤 눈을 감은 상태로 저와 함께 하고 있는 남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 마음이 져미는 느낌.
당신 뭔데, 당신이 왜 이렇게 함께해주는건데. 왜이렇게 고마운건데.
윤봉길선생님의
가나자와암장지
모두 아시겠지만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1945년 해방 이후 발굴되어
현재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되어계십니다.
비교적 가나자와 성 자체는 가나자와 여행객들도 쉽고 무난하게 다다를 수 있는
가나자와 시내 안에 들어가있는 인기있는 관광지였기때문에 보고 느끼는데에 시간도 오래걸리지않고 어려움이 없었지요.
또한 현재에는 과거 윤봉길 의사가 구금 되었을것으로 추정되는 아마도 가장 확실한 곳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용화장실로
다시 지어진 모습을 보고, 암담함에 오히려 마음에 와닿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윤봉길 선생님의 가나자와 암장지로 향하면서 점점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곳은 대중교통이나 혹은 자동차를 타고 가야만 그나마 어렵지 않게 다다를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합니다. 가나자와 역 근방에서 30분정도남칫이면 , 도착할 수 있는 공동묘지 안에 바로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가 존재합니다.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石川県戦没者墓苑)'에는 윤봉길 의사의 순국기념비와 암장지적비(암장묘비)가 있습니다.
'전몰자 묘원'은 우리나라의 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은 자들을 위한 공동묘지이기도합니다.
주소 :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노다쵸 노다야마 4-1 휴게실부근
(휴게실건물 바로 오른쪽 내리막길계단)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는 가나자와에서 총살 당하셨고.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 시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에서 형틀에 묶여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습니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으며,
그 매장 장소는 바로 이곳.
일본군은 신문에 '윤봉길의 시신은 화장했다'라고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의 소각장 옆 좁은 통행로에 암장했습니다.
어제는 이젠 두번째 방문이라고 꽤 쉽게 찾아갈 수 있었지만, 구글맵만 가지고 이곳을 찾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만일 하나, 길을 잃어서 찾기가 어려운 상황에 쳐해도, 절대 지나가는 일본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진 않으리라, 혼자서라도, 남편과 둘이서 해결할것이다. 라는 괜시리 집념같은 마음이 살아나기 시작했죠.
그리고, 처음 방문했고, 처음 암장지를 발견했을땡[ 경황이없어 밟고 내려왔던 계단들을 다시한번 올려다보니, 아. 어디선가에서 본 사진.
바로 그곳이구나 싶어 제가 저 계단을 밟아도 되는건가요, ㅠㅠ 라며 조금 죄스러운 마음마져 들 정도였습니다. 암장지는 멋드러지게 넓직하게-_-;; 꾸려둔 러일전쟁에서 죽은 일본의 군인들을 기리는 국군 묘지앞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왼편으로 국군묘지를 지나가다보면 바로 오른쪽에 작은 휴게소 건물이 나오는데 그 옆계단이 바로 저 사진속의 계단인 것입니다. 계단을 내려가려 고개를 빼꼼 내빼다보면, 고귀하게 자리잡은 윤봉길 선생의 암장지 현장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쓰레기 하차장 앞에 사람들이 걸어다니면서 밟으라며, 윤봉길 선생님의 유해를 봉분없이 처참히 묻었던 잔혹함. 또한 이곳에 암장된 이유는 , 일본 헌병대 관리실이 있던 곳이므로 언제나 감시될 수 있는 자리였기애 이곳에 매장했다고 전해내려지고있어요. (비열 그 자체....-_-)
또한 봄과 가을에 일본 군인들을 위한 큰 제사가 있는데, 제사 후에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소가 바로 이 암장지였다고하네요. 뒤끝이 아X총리 저리가라입니다.
윤봉길 의사 암장지적 이라고 한문으로 표기된 표지석 (동그란 비석)
표지석 바로 좌측으로 석묘처럼 만들어져 촛불을 피우고 헌화할 수 있게끔 잘 조성되어 있는 공간이있습니다.
'장부출가 생불환'이라는 윤의사가 남긴 말이 한자로 새겨져 있어요.
지금 현재 포스팅에서는 올해 3월 22일에 방문한 기록의 사진들을 기준으로 작성하고있습니다만, 다녀온 어제 7월 21일의 한여름 이곳을 방문했을때에까지도 저는 저 자료고를 열어볼 생각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 문만 열면 방명록을 쓸수있는 수첩이 있다고하는데 ㅠ_ㅠ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뒤, 두번째로 방문하는 기념비 장소에서는 다녀간 방명록을 항상 기록했었는데요, 참나... 휴..
마음과 머릿속에는 온통 지난 3월 22일에 방문했던 기억들밖에없기애, 산속의 모기도 걱정 안하고 무작정 무방비 상태로 남편과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방문한것은 정말 큰 용기였습니다
여름에 방문하게되실 분들을 위해 간략한 팁을 드리면,
여름이 되어 방문하니 좀더 길고 높아진 숲안에 쌓여진 귀중한 공간의 느낌인것과 더불어 수십마리의 모기들에 휩쌓여 , 집중해서 기도드리기도 어려울정도 준비해온 술을 여기저기 뿌리지도 못할 정도 아무것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남편이 정말 괴로워했어요. 반바지를 입고있어 저보다 배로 물리고 있었거든요.
모기약 몸에 바르고 가시거나, 관련 도움이 될 약들은 꼭 챙겨가시는게 좋습니다. 산속이다보니, 여기저기 거미줄이나 거미, 등 신기하기까지한 벌레들이수시로 왔다갔다하는데 그상황에 벌레가 뭐가 중요하냐만은 저는 알러지가 일어날정도로 벌레에 취약한 성격에서 정말 그나마 잘 참으며 남편과 나뭇잎도 쓸고, 정리도좀 하고 준비해온 꽃도 꼽고 찬조금도 넣고 할것은 다 했지만,
왠지 윤봉길 선생님이 내려다보고계실것 같은 그 장소에서 남편이랑 저랑 오두방정을 떤것 같아 할도리를 다 못한것 같은 느낌에 정말 현장을 떠나는 내내 찝찝하고 죄송한 마음이 컸다죠. 약 꼭 챙겨가세요. 바르는 약이든 뭐든. ㅠ_ㅠ
자료고 오른쪽 문에 부착되어있는 윤봉길 의사의 유해발굴단 사진
윤봉길의사 유해발굴단이, 윤봉길의사의 유해발굴 당시, 분통을 금치 못했다고하죠.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당시 일본인들의 악랄함이 현장에 고스란히 남아있었기때문이에요. 공동묘지 관리사무소 입구이자, 쓰레기 하치장 앞 바닥에 안치되어있었는데,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밟으라고 하기위함 이었다고 전해지고있어요. 그 자리에 지금2019년에 제가 서있다고 생각하니, 소스라치게 서글퍼지고,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광복 후 14년만에, 윤봉길 선생의 유해는 대한민국으로 봉환됩니다.
‘임시정부유해발굴단’은 가나자와에 거주하는 재일 한인들의 도움으로 윤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는 데 성공하였는데요. 당시 현지 발굴단의 조직을 보자하면 발굴본부장 서성민, 총지휘 박기섭, 사진 김창율, 현장책임자 박동조, 정보 박성조, 수송 노경수, 섭외 구범식 김기억 등과 같이 조직적으로 발굴을 수행하였습니다.
발굴 나흘째 되던 3월 6일, 정보 박성조가 매장을 할때 독경을 했다는 각존원의 야마모토 료도 라는 여승을 데리고 왔는데.
여승은 헌병이 가리키던 곳 보다 더 육군 묘지에 가까운 통로를 가리키며 그곳에 북침으로 매장했다고 알려줬다고합니다. 그곳은 며칠동안 발굴단이 휴식처로 사용했던 장소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 한복판 이었고, 현장 책임자 박동조가 소금을 가지고와 일대를 깨끗이 한뒤 술을 따르는 의식을 마치고 땅을 파면서 윤봉길 선생의 유해 발굴 작업이 시작됩니다.
저도 뒤늦게 알게 된것인데요, 윤봉길 선생의 유해를 발굴뒤 이틀간 안치했던 곳이있는데 그곳은 시간을 내서 별도로 방문해보고싶은 곳으로 리스트에 넣어두어습니다. 현재는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고하네요...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히가시야마 2-16-3)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는 약 2평정도의 넓이로, 2017년경 영구 임대를 받아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곳 암장지로부터 1km 지점에 , 윤봉길 선생의 순국지가 있습니다만, 일본이 허락하지 않아 갈 수 없는 곳으로 알려져있고, 더 마음이 아픈것은 이곳 암장지에 윤봉길 선생의 유해중 일부(손뼈 등) 소나무 뿌리에 얽혀 아직도 이 암장지에 남아있다고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당시 유골은 총 201개 수습되었었는데, 7개가 모자라는 상태에서 이는 손뼈 등이 고문 등으로 상해버려 13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소나무 뿌리속에서 없어진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번에 갔을때에는 지난번에 없었던 푯말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손수 글씨로 적어내려가신 푯말이었는데요. 아무래도 한국분들의 발길도 늘어나고 있는것 같았고, 추가적인 설명이 더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서 "전화주시면 10분내로 올 수 있습니다. 전화주세요"(부가내용생략) 라며 번호를 적어놓으셨고, 그 아래에는 "박현택" 이라는 세글자의 성함역시 적혀있었습니다.
일본인남편은 이 푯말을 가장먼저 발견하고는 (아..언제나 나보다 먼저 발견하는것이다.....ㅠ_ㅠ)
"마루짱, 이전에는 이것 없지 않았어?" 라며 먼저 캐치해 주었기애 저도 발견할 수 있었죠.
기특기특....
알고보니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를 영구임대하는데에 성금을 모아 기여하고 관리하셨던 2009년에 돌아가셨다는 박인조 선생님의 조카이신 재일교포 박현택 회장님이셨어요. (인터넷의 기록으로 알게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집이나 사무실이 근방에 있으신 것 같았어요. 어제 7월 21일 방문까지 저희부부는 총 2회차 방문이었는데, 여기저기 쏘아대는 모기떼 덕분에 더이상 머무르기 힘들어 일단 할 도리는 최대한 한뒤 암장지를 떠났지만은, (어제의 기록역시 유튜브 영상으로 담을 예정이예요 ㅠ)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다음 방문때로 예상되는 늦가을 즈음에는 박현택 회장님께 직접 연락을 드려서 조금이라도 남편과 제가 자세한 설명들을 듣는것을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합니다. 꼭 그렇게 하도록 하하려구요. 저역시 인터넷의 후기라던가, 간략히 추려진 책의 내용들을 토대로. 그리고 앞서 설명된 임정로드 4,000km의 저자 이시기도한 김종훈 기자님의 피드백으로 겸사겸사 다녀오고는 있지만, 박현택 회장님의 설명을 들으면 좀더 자세히 몰랐던 역사의 일부를 전해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첫번째로 방문했을때에는 경황이없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채 방문만 한 채였는데요, 이번에 두번째로 방문했을때에는, 꽃과 꽃병 (꽃병은 필요없어서 그냥 가지고왓어요 ㅠ) 소정의 찬조금과 진로 소주를 가지고 왔습니다. 소주는 남편과 플라스틱 작은 컵에 서로 따라 비석 주변에 골고루 뿌리고 그리고 좁은 통로 계단에도 뿌렸습니다.
"노여움 푸세요......" 라며.
그리고 나보다 더 길게 기도하던 남편. 아... 모기가 정말 괴물처럼 달려들더군요 ㅠ_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다 저조차도 처음엔 발견하지 못했던 비석 뒷편에 있는 곳에 방문자 누구나 쉽게 사용하게끔 준비되어있는 청소 도구들을 하나 가지고와 여기저기 널부러진 잎들을 쓸어내는 남편. 뭐부터 해야할지 잘 몰라 긴가민가하고있던 제 옆에서 솔선수범 빗자루를 가져와 비석 근처를 조금이나마 깨끗하게 정돈하는데에 앞장섰습니다.
내가 먼저 해야하는데!!!! 또 남편에게 선두를 빼앗기고 맙니다.... ㅋㅋㅋㅋㅋㅋ
너무 고맙고. 늘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한국의 이야기나 한국 역사등에 귀를 기울여주고, 또 직접 참여해서 자신의 부인의 나라에는 어떤 마음아픈 역사가 있는지 오해없이 알고싶다며 노력을 서슴치 않는 저희남편에게 늘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순국기념비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노다쵸 노다야마 4-1 윤봉길의사 암장지적비 부근
윤봉길 선생의 순국 기념비는
"윤봉길 선생의 유해를 암매장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그 장소를 기리기위해, 재일한인들이 성금으로 세운 암장지적비와 순국기념비가 건립된 곳입니다."
순국 기념비는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묻혀있던 곳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5분정도의 거리에 있는 언덕에 자리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7월중순) 숲이 우거져있어 좀 자세히 살펴봐야 발견하실 수 있지만 도로와 경사높은 계단으로 이루어져있기때문에 계단을 발견하셔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봉길 선생의 순국기념비를 쉽게 찾는 방법은 바로 , 다이죠지쿄우료우 공원을 찾는 것이기도한데요.
저희가 늘 주차하는 주차장 바로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던건 다름아닌 윤봉길 의사의 순국 기념비입니다.
주차장의 이름은 " 大乗寺丘陵公園 "(Daijoji Kyuryo Koen Jobu Parking ) <다이죠지쿄우료우공원주차장> 입니다.
주소는 石川県金沢市長坂町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나가사카마치)
바로 이런 커다랗고 길죽한 간판을 보게된다면 넓게 펼쳐진 공원과 넓은 주차장을 보실수 있을거예요.
이 공원은 가나자와 남부에 펼쳐진 구릉지로써, 가나자와를 대표하는 공원(종합공원)이기도합니다. 주차장은 3개로 나뉘어져있고, 주차당 입장료도 무료입니다.
이곳은 잔디언덕과 꽃놀이에 인기가 많은 공원이기도한데요, 가나자와의 야경을 내려다 볼수 있는것또한
잘 알려진 여행 관광지이기도합니다. 대락 4월 중순부터 5월상순까지 절정을 이루는 철쭉 제철을 만끽 할 수 있는 공원으로도 유명하죠. 암튼 이외에도 꽃이 피는 공원으로 인기인 곳이기도해요. 아무튼. (이해를 돕기위해 본 공원을 설명드렸어요. 꽃이 가득하거나 푸른 언덕이 보이고 이 간판이 보이면 바로 그곳입니다.)
이 공원의 이 간판을 왼쪽에두고 길을 건너면, 왼쪽에 기념비, 오른쪽에는 또다른 묘지가 펼쳐지는데, 좌측으로 건너 쭈욱 내려가다보면 어렵지않게, 앞서 소개한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코앞에 일단 기념비가 있긴하지만, 돌아올때 들르는곳이 이곳 순국 기념비예요.
이제는 순국 기념비는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게되었구요.
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와 암장지적지 부근에는 러일전쟁 때 포로가 되어 가나자와에 연행되어 왔다가 사망한 러시아 병사들의 묘가 있죠,
러일전쟁 말기 가나자와에는 약 6천명의 러시아군 포로들이 시내 각지에 나누어져 수용되었고, 일본군은 러시아군 포로에 대해 국제조약에 따른 '인도적인' 처우를 다했으며, 사망자에 대해서는 육군묘지 안에 묘비를 세우고 후하게 안장했다고 합니다. 윤봉길의 유해를 암장하고 방치한 것과는 달리 현재도 관리가 잘 되어 있어 대조를 이루고 있죠..
현재 가나자와시 한국어판 홈페이지에는 노다야마 묘지에 대한 설명에 윤봉길의사가 묻혀있었다는 내용이 실려있으며 지속적인 관리로 보존상태가 양호합니다.
또한 순국 기념비는 대한민국 방향으로 향해 세워졌다고해요 (ㅠㅠ) 또한 만들어진것은 일본이 아니라 서울에서 제작한 뒤에 부산을 거쳐 배를통해 일본 가나자와로 왔다고합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역시나 기념비 주변에 낙엽들이나 풀들을 좀 정리한뒤에, 순국기념비를 방문한 사람들이 작성할 수 있는 방명록이 준비되어있다는 팻말을 보고, 조심스럽게 철통방어가 된듯 튼튼한 무을 열어보니 끼익- 소리와함께 촛불, 펜과 팜플렛, 그리고 방명록 등등의 물건들이 보였어요.
자신의 이름과 주소 등을 기록하는 남편. 저도 따라 이름과 날짜 등을 기록했고 정말 많은 분들의 방명록도 볼수 있었습니다.
따로 메세지를 쓰는 공간이라기보다는 방문자의 이름과 간추린 주소, 직업 등을 기록할 수 있었어요.
2012년 정도에 윤봉길의사의 순국 기념비에 정체모를 말뚝 테러를 당한적이있는것, 기억하시는 분들은 기억하고계실거예요.
순국 기념비를 뒤로하고 빛나는 사각 철판? 동? 위에 새겨진 글자들 위로 이건 누군가가 실수로 했다고는 이야기될 수 없는 아주 강한 힘이 가해져야 가능한 흠집이 예전부터 늘 거슬렸었습니다. 어리석은 일부 일본인의 짓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고, 남편역시 일본인이 저지른 짓이라고 예측된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아꼈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2015년도에 찍힌 사진역시 이 흠집이 고스란히 보여지고있어 적어도 4년이상 된 흠집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군지모르겠지만 대대손손 벌받을거라고 확신합니다.
이 게시물을 준비하다보니, 마음이 술렁이고 머릿속으로 정리가 안되어서 계속해서 미뤄오다가 광복절을 기점으로 업데이트 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어제 다녀온 2번째 방문 기록과 함께 금일 블로그에 포스팅 하게되었네요.
3번째 방문때에는 암장지에 이어 기념비까지의 쉽게 찾는 맵을 그려와보고싶어요.그리고 지난번과 이번까지 방문하지 못했었던 박인조 선생님의 묘도 찾아뵙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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