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Korean, and live in Japan

일본인남편과 평화의 소녀상을 만나러

2020. 2. 20.

maruko

가나자와 거주, 쥬얼리 제작자. 유튜브 채널에서는 일본 도시락 만들기및 가나자와 풍경 기록중입니다. 🍱

일본인남편과 평화의 소녀상을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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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29일 일요일

1461차 "평화의 소녀상이 빛나던날 "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벌써 눈깜짝 할 사이에 2020년 새해의 2월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늘 새해의 기분은 이런식이었던 것 같아요. 해피뉴이얼~ 이라고 종각역 보신각종 타종행사를 보던 그 자정 무렵의 신선함이 무색할 정도로 벌써 1월말, 그리고 곧 벌써 2월 말이 될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저의  SNS공간에 대한 계획도 머릿속에서 발빠르게 바뀌어나가 새로운 블로그의 새로운 공간을 선택해 머릿속의 생각을 옮겨 담을 것을 다짐했고, 절대 손대지 않을 줄 알았던 유튜브의 채널을 본격적으로 운영해나가며 어떤 한편으로는 또한번 새로운 도전을 내밀며 2020년 한해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살고있는 나라는 꽤 정신이 없습니다. 난 일본인이 아니지만 국민이 자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느낌의 공기가 내 머릿속과 몸을 감싼 느낌은 한국의 수년전 상황과 데자뷰되며 섬뜩하기까지합니다. 외국인으로써 비자를 받고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내몸은 내가 지켜야해" 라는 생각이 좀더 강하고 절실해집니다. 일본인들에겐 그나마 "나라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 라는 회피섞인 언제나 싸늘한 반응인 사람들이라 그들의 정신에는 다행인건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모습들도 최근엔 차차 변화하고 있는것 또한 사실입니다.

 

늘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나는 마루짱과의 관계가 더 중요해~" 라고 이야기하던 그 수많던 일본 친구들과도 나는 자연스럽게 연락을 하지 않게되었습니다, 한번 내뱉는 말로는 이곳의 국민성을 감히 이야기하기가 참담하기까지 하여 한국에서 들려오는 좋은 소식들을 들으며 그나마 일본 생활에 힘을 내고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으며 한국인인 제 덕분에 한국의 상황도 더 잘 알게될 수 있고, 또 자신의 한국 사회 경험을 토대로도 일본에 매일 나오다싶이 쏟아지는 편파적인 거짓방송 등에도 남편이 꿈쩍하지 않는 것일지도요.

 

몇일전 오전의 국민적 방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ZIP 에서는 일본 핸드폰 브랜드의 새 모델 출시를 홍보하며 영상화면 맨 마지막 수 초동안 삼성 갤럭시 제품을 내보냈기도 했고, 남편과 저는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와,

 

지난 2019년 연말부터 올해 연초까지 , 저는 친정이있는 서울에 일본인 남편과 함께 머물렀었습니다. 아직 풀지 못한 많은 사진들을 보고있자니, 어서 분발해서 새 블로그에 글을 적어 내려가야할 것 같네요 

 

이전에는 친정에서 잠을 자며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남편과의 서울 스케줄을 잘 소화할 수 있도록, 그리고 남편에게 부담을 덜어주기위해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호텔을 숙박장소로 잡아내고 지난 2019년 여름에 방문하지 못했던 곳들을 방문하며 남편에게 한국의 역사를 알려주고 저역시 몰랐던 사실을 배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리 상냥하고 착하디 착한 나의 친정 식구들이라고해도 남편에겐 장모님의 존재이기때문에 남편이 긴장하지 않도록 프리덤을 건내고 싶었어요 (웃음)

 

친정에서도 진득하니 시간을 보내며 오랜만에 한국 방송들도 보고 엄마랑 할머니랑 남편이랑 넷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울고 떠들고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르겠어요 🙂저보다 사위를 더 예뻐해주셔서 저는 찬밥신세쓰~ㅎㅎ

 

친정에 방문한것은 신정즈음이었기 때문에, 이미 남편과 함께 김구선생님의 서거장소를 다녀온 터였고, 오마이뉴스의 김종훈 기자님을 뵙고 임정로드4000km 책을 선물 받은 등,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 방문한 뒤였고 그러한 일상들을 외할머니께 말씀드리니 한참을 듣고 계시다가 눈가가 촉촉해지신채 저에게 단 한마디를 건내셨죠 

 

 

 

"우리 손녀 애국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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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일제 강점기 시대였던 1910년 부터 45년까지,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광복할때 무렵의 저희 할머니께서 8세의 꼬마 아이었던 시절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외할머니께서는 외할아버지와 결혼하실때까지 거의 종로쪽에 살고계셨던 것 같습니다. 옛날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애 저도 이것저것 물어본적이 없어 요즘처럼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또한 아마 할머니의 인생에서 처음이실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라는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마음을 꾹 닫고 혼자만의 세상에서 지내기를 좋아하던 아이었거든요. 

 

살갑게 웃으며 이야기한적도 아버지덕에 잠시나마 부유하게 살았던 유년시절 이외에는 중학생시절 터진 IMF로인해 갑자기 변해버린 생활의 모든것들에 더더욱 마음의 문을 꾹 걸어잠그고 그것이 열리게 되기까지 20년 이상이 걸리기도했었습니다. 

 

어떻게하다보니 당신의 손녀는 일본인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고, 사위와 정신없이 한국의 역사 유적지에 방문하기 바빠보이며, 다른 나라도 아닌 일본 국적의 손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열린 마음으로 한국의 역사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고 하는데 얼마나 기특해보이셨겠어요.

 

 개 ㅆ 마이웨이로 살아온 제가 남편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친정 식구들에게 애교한번 떠는게 너무 숙쓰러웠던 성향이 싹 사라지고 남은 인생이라도 엄마와 할머니께 정말 조금이라도 잘 해드리기위해 내 나름대로 가족을 대하는 소극적인 성격을 바꾸려 노력해야겠다 라고 생각하게 된건 정말 불과 얼마 되지 않았어요.

 

어린나이에 할머니 손에서 키워졌고, 또 꽤 빨리 독립을 하며 세상 혼자인듯 하고싶은 일 하며 돈벌고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기애, 지금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친정 가족들에게 애틋함이나 후회감,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배로 커지게 된건 아닐까 싶어요.

 

할머니 손에서 자라면서 저는 정말 많은것을 배웠었어요.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 사람이 참을줄도 아는방법. 싫어도 싫은티 내지말고 사회생활을 했을때에 나에게 이득이면 이득이지 불리해지진 않는다는 사실. (물론 뒤에서는 혼자 와자자자자 스트레스를 풀어제끼지요) 등등.

무엇보다 인간을 대할때에 배려와 같은 사소하지만 긴간세계에 기본적인 도덕적 윤리와도 같은것들은 덤으로 길들여져 있었죠

 

그런 할머니께 애국자라는 칭찬을 들으니, 그 누구에게 듣는 칭찬보다 기쁨이 가득했죠. ⠀⠀⠀⠀⠀

 

한때 이시국에 쇼를 한다는 둥, 니가 무슨 일본사는 주제에 애국자냐는둥 어떻게하면 저사람을 내리 깔수 있을까 연구계발이라도 하는것마냥 비아냥대던 수준낮은 일부 네티즌들의 헛소리보다, 그냥 저희 외할머니께 듣는 애국자라는 말이 가장 최고의 찬사예요. ⠀⠀ ⠀⠀⠀⠀⠀⠀⠀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의 평화의 소녀상 위치 및 주소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2.3.4가동 율곡로2길 평화의소녀상

 

 

 

 

 

 

 

 

 

 

남편과 저는 연애시절부터 여기저기 걸으며 산책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동안에도 많은 언급이 있었지만 대학로에서 홍대까지 걸어가는 둥, 그 걸어가는 여정에는 많은 볼거리들도 즐비하고 1호선 노선과 2호선 노선을 번갈아가며 모든 역들을 지나가게 되어있어 제가 좋아하는 종로부터 인생의 절반이 물들여졌다고해도 과언이아닌 홍대근방까지, 어디든 걸어가니며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므로 인해 발견하지 못하는 귀중한 공간이나 카페등을 발견하는 데에도 도가 텄죠 , 걸으며 이런저런 담소 나누며 예전 기억들을 꺼내는 감성놀이도 추가.

 

이날도 꽤 걸어다녔던 날이었습니다. 탔던 버스는 유일하게 홍대까지 저희를 데려다줄 273번 뿐이었어요. 아무쪼록 지난 여름에 김복동 할머님의 영화를 남편과 함께 에무시네마에서 관람했을때엔, 평화의 소녀상에 함께 갈 생각이 미쳐 떠오르지 못했었어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생활하며 여러가지 상황들에서 느끼게되는 점들이 머릿속에 하나둘씩 또 모아져 "그래 다음에는 남편과 함께 직접 평화의 소녀상을 만나러가자 "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바로 옆건물에서 몇년전에 3달동안 지인 가게에 아르바이트를 도와줬던 적이있었는데 그땐 정말 코앞에 있는 평화의 소녀의상을 아침마다 지나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전일찍 안국역까지 버스를 타고와서 평화의 소녀상 앞을 지나 가게까지 오픈하기위해 향하던 발걸음과, 이번 남편과 함께 방문했을때의 마음은 정말로 남달랐습니다. ⠀⠀⠀⠀⠀⠀⠀ ⠀⠀⠀⠀⠀⠀⠀

 

 

 

 

 

 

 

 

 

 

이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을 기리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확립하기 위한 조형물(동상) 입니다. 평화비(平和碑) 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도합니다.(위키백과 발취 https://ko.wikipedia.org/wiki/%ED%8F%89%ED%99%94%EC%9D%98_%EC%86%8C%EB%85%80%EC%83%81)

 

 

저희가 갔을때에 평화의 소녀상은 누군가가 정성껏 뜨개질한 양말과 부직포로 만들어진 3가지 컬러의 나비 목걸이 및 목도리를 착용하고 있었어요.  저희부부가 일본으로 이주하기 전 동탄에 살고있을때 메타폴리스 광장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을 보았을때에도 제가 착용하고 있던 까만 머플러를 소녀상의 어깨에 감싸내고 돌아온 기억이 있는데요 ⠀⠀⠀⠀⠀⠀ ⠀⠀⠀⠀⠀⠀⠀

 

 

 

 

이 사진을 찍었던게 아마 2018년 작년 초 겨울이었을거예요.  홈플러스에 오며가며 항상 이 앞을 지나가며 평화의 소녀상 얼굴과 멈춰있는 눈동자를 보고지나가곤했죠.

저희는 일본으로 이주 하기 전까지 남편 회사가 있는 "동탄"신도시에서 생활했었어요. 서울 친정집으로부터 떨어져 명동쪽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40~분 가량 떨어져있는 곳, 동탄 메타폴리스 광장에는 정말 반갑게도 평화의소녀상이 설치되어있었거든요.

겨울이되면 사람들이 장갑과 모자, 목도리 등을 평화의 소녀상이 따뜻하도록 포근하게 둘러주기도하구요, 저도 이 사진을 찍고나서 착용하고있던 까만색 술달린 목도리를 평화의 소녀상 어깨 가장 바깥쪽에 꽁꽁 싸매주었답니다. 눈도 많이 내린 이후라 눈도 많이 쌓여있었고, 미끌미끌했던 날로 기억해요. 밤하늘 공기는 춥다못해 싸늘함 그자체. 하늘은 춥다는 날씨를 확인이라도 시켜주는듯, 까맣지 않고 영롱한 푸른빛이 돌았지요.

일제 강점기 시절에 저희 외할머니또한 가슴아픈 일들을 겪어오셨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온 유년시절에도 늘 꼭 붙어 함께 살아오며 유일하게 저를 돌봐주셨던게 바로 외할머니세요. 마음아픈 역사가 있어도 세상은 빠르게 흘러가고 당사자들의 마음은 이미 그시절 오랜 기억속에 시간이 덜컹 하고 좌물쇠로 잠겨버렸을지 모르겠지만 이세상 모든것들은 야속하게 흘러가고야말죠.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못한채 흐르는 시간속에 원망과 한탄은 더해가고 그것이 결국엔 무뎌져 더이상 뭘 하고자하는 끈기와 이성을 상실시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남편이 한국의 저희 친정에 방문했을때에, 뜻밖에 할머니의 이야기들에 남편도 잠시 말이 없어지기도했지요. 말씀을 굳이 안하셔도 저희 외할머니 정도 연세라면, 더군다나 일제강점기를 겪어오셨던 분이시라면 정말 일본이름은 하나씩 가지고 계셨을거라는 추측정도는 할수가 있잖아요.

"엄마~! 나한테도 그런거 이야기 안했잖아!"

일본이름이 가졌었다 라는 할머니의 고백에, 갑자기 놀라 외할머니팔을 잡아 당기며 엄마가 서운하시다는듯 말씀하셨죠. 저희할머니... 보통분이 아니십니다. (쿨럭) 수십년간 엄마한테도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으셨던... 뭐, 할머니 판단에는 이야기할 이유가없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죠.

남편은 지난 "말모이" 라는 영화에서 조선인들이 한글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악질적인 행위를 가하는 과거 일본이 저질렀던 만행을 영화를 통해 봐왔었고, 이렇게 실제로 일본이름을 가질수밖에없었던 것을 사실에 근거하여  직접적으로 들어볼 기회는 처음이었던것이고, 그런 경험또한 처음이었던거죠. 외할머니가 엄마한테까지 말씀을 안하셨다라는건.. 정말 할머니께서는 기억하기 싫으신 시절이셨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자녀들을 키우고있는 동네라 , 밤낮할것없이 꼬마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광장 한켠에 설치된 소녀상에도 춥지 말라며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눈으로 확인할수가 있었어요 

 

 

 

 

 

 

이날은 남편과 오전일찍 종각 부근 김밥천국에서 분식을 먹고 한국 최초 우체국인 "우정국" 쪽 회계사 에 들러 새해 소망을 적고 그다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을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곳으로 이동 한 상태였습니다. 저 멀리서부터 보이는 흰 비닐 텐트를 발견하고 안에는 한분이 들어가 앉아계신 것 같았어요. 대학생 소녀, 소년들이 돌아가면서 위안부 소녀상을 지키며 머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묻기 위해 텐트 안에 앉아있던 소녀에게 말을 걸었고, 그분께서는 서둘러 텐트 밖으로나와 저희를 환영해주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어요 , 특히나 일본인이었던 남편을 보고 더 반갑게 맞이해주셨고 대학생들이 직접 만든 팔찌의 이야기, 놓여진 서명서 이야기 , 지금까지의 수요집회 이야기등등 간략하고 알기쉽게 정보를 전달해주셨죠.

 

학생분들이 직접 만드신 고무팔찌는 지난번 김복동 할머니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무료로 받았던 보라색 팔찌와 같았어요. 남편과저는 하나씩 골라 팔에 착용하고, 소녀상과 함께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이곳에서 매주 수요일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립니다. 공식 명칭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입니다. 대한민국 주재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이 집회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추산으로 연중 집회 참간 인원을 5만여명정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92년 1월 처음 시작되었고, 500회가 된 2020년 3월 등 단일 주제로 개최된 집회로는 세계 최장 기간 집회 기록을 갱신하였으며 이 기록은 매주 갱신되고 있습니다 .

 

저는 아직까지 수요일 집회에 참여한적이 없어요. 기회가 된다면 남편과 함께 참여해보고싶지만 일단 현재까지는 제가 살고있는 이시카와현 고마츠 공항에서 인천공항편을 사용하면서 수요일은 한국에 있기가 힘든(어쨌든 수요일엔 또 돌아와야하는 비행기를 타는) 스케줄을 가지고 있다는 사정과 핑계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고마츠>인천공항행은 비행기가 일주일에 3일만 다닙니다)

 

따로 저혼자 시간을 내서 그 시간에 참석할 수 있도록 맞추거나 언젠가 남편과 속시원히 기간에 제한없이 한국에 방문할 수 있을 때를 기다려야할 것 같아요. 제가 남편을 만나 결혼하기 전에는 왜 가본적이 없었는지 그것이 알고싶을 뿐입니다. 하하..

 

때가 늦었어 라는 생각보다는 이제라도 제가 무언가 할 수 있고, 좀더 소녀상및 나라의 일들을 위해 에너지를 소비할 수 있음에 말 그대로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생각뿐입니다. 

 

 

 

 

 

 

 

2019년 한해에만 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 다섯분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중엔 남편이 영화로도 접한 김복동 할머님도 계십니다

이제 스무분의 할머님들이 남은 상황인데요, 이글을 쓰고있는 2020년은 한일 강제병합이 맺어진지 110되는 해이고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가 결성된지 30년을 맞는 특별한 해라고 할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타향살이 하시는 많은 분들께서 그런 말씀하십니다. 고국에서 떠나고나서야 나라에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배가되고, 애국심이 불타오른다 라고 말이예요.

 

저역시 제 개인 삶에 찌들어 앞만보며 살아갔을때에는 너무나 익숙한 공간인 대한민국에 대해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았었어요. 나라를 떠나고서야, 그리고 일본에 와서 살면서 겪게되는 너무나도 난무하는 "허위사실" "왜곡보도" 등을 미디어로 통해 접하고 또 그것을 믿고 반응하는 이곳 사람들을 겪게되면서 정말 가슴에 한이 맺히고 내자신이 역사에 무식하고 무지하면 안되겠다. 라는 욕심이 생겨 뒤늦게나마 타오르는 열정이 충만할때 이렇게라도 , 간접적으로라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써 좀더 진중한 애국자가 되어야겠다 "되고싶다" 라고 생각한것입니다.

 

그리고 저와함께 동행해주는 남편에게 너무나 고마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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